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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0년 7월호 '문화와 영성' 원고)

austin 2010. 7. 6. 14:21

(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07월호 '문화와 영성' 원고)

제목: 안식일의 주인

필자: 원영배 어거스틴

 

율법의 완성에 속임수가 필요하지 않으며

진실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는 완전하다. (집회서 34, 8)

 

예수님은 인간들의 불완전한 세상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힘입어 회복되어야 하는 점을 알고 계셨고, 그 때문에 당신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명을 숨기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의 베짜타 못가에는 환자들과 불구자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들은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먼저 들어가서 낫게 되기를 저마다 소망하고 있었다. 차례가 여간해서는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중환자 한사람이 그날 예수님의 방문을 받는다. 이미 38년간이나 누워서 앓고 있던 그가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원의 기척은 생각지 않게 등뒤에서 다가온다.

 

"그대는 건강해지기를 원합니까?"라는 예수님의 물음을 받고 이 환자는 당황했는지 모른다. 대답대신 자신이 건강해질수 없는 이유를 탓하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감을 변명처럼 토로한다. "주님, 물이 출렁거릴때에 저를 물속에 넣어줄 사람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인 치유를 어렵게 만드는 다른 장애 때문에 그가 머물러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당신의 말씀만으로 그를 즉시 낫게 하며 명하신다. "일어나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요한 5, 8)."

이것이 유대인들의 눈에 크게 거슬렸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에 관하여 색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예루살렘의 호텔에 묵을 때마다 겪는 행사치례가 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불로 조리한 음식이 제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면 층마다 일일이 다 멈추게끔 자동으로 맞추어져 있어 계단을 사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리고 불편했던 기억이 남는다. 이른바 'Sabbath elevator'라고 불리는 이날의 엘리베이터는 층을 표시한 버튼을 누르는 이용객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다.   

 

안식일에 손끝도 까딱할수 없게 모든 활동을 규제해온 유대인들의 율법규정들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막아버려 예수님이 풀어내야할 숙제가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 문제로 부딪치게 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신다.(마르 2, 27) 또 병자를 고치시기전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고 퀴즈문제처럼 물음을 던지기도 하신다.(루가 14, 3)

 

하지만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사실이었다. 신성모독이라는 죽을 죄를 범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여섯날동안 창조를 이룩하시고, 그다음 일곱째날에는 쉬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안식일이 연유한다는 것쯤은 물론 누구나 알고 있다. 창조작업을 매일 마무리지을 때마다 어김없이 '보시니 참 좋았다'는 창조주 하느님의 관조 소감을 엿듣고 있는 성서의 독자로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은 자연스러운 양심의 반응이며 성찰이 된다. 타락하고 병든 부분이 눈에 뜨인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에 누를 끼치는 불완전함과 부조화라고 안타깝게 느끼게 되는 마음 또한 당연한 것이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신 창조주의 일성을 모독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짓으로 몰아가는 손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쳐 바로잡고자 세상 속으로 오신다.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날, 안식일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모습 그대로 회복시켜주시기에 도리어 알맞은 화해의 날이다. 예수님이 실천하시는 대로, 어둠 가운데 묶인 자를 풀어주며 병자를 낫게 해주시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하신 창조의지를 읽고 다시금 기뻐할수 있게 된다. 사람의 편에서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는 깨어남을 가져야 할 날이다. 몰두하던 일을 멈추고, 창조주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며 그분을 바라보는 일만을 모든 것으로 삼는 날이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눈에 드는 창조를 기억하고 거룩하게 기리는 날이니만큼,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는데 바쳐진다면 안식일을 잘 지내기 위해 그보다 더 적합한 길은 없다. 베짜타 못가의 병자가 침상을 들고 걸어갈 때 그는 온전해진 모습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행동의 당당함 속에서 하느님 보시기에는 훌륭한 창조의 완성이 이루어지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되살아난다. 예수님은 '내가 일하는 것은 내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창조 이후의 세상에서 결코 손을 떼거나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확언이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율법을 깨뜨림으로써 율법이 비로소 완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침상을 들고간 병자의 경우처럼 보여주고 계신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5, 17; 루가 16, 17) 

 

지키지도 않는 율법규정을 벗어던지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허세와 위선을 드러내는 데서 율법을 깨고 바르게 완성할 실마리를 얻게 된다. 율법학자들의 오만을 가리키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가 11, 52) 

 

모세가 하느님의 가르침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불충실한 이스라엘 앞에서 던져 깨뜨렸듯이, 예수님도 마음이 굳어버린 자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허망하게 붙들고 있은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질책하신다. 그들이 쌓아올린 위선이 심판의 때에 도리어 그들 자신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말 것이다.

 

율법의 속박을 허물어뜨리고 예수님이 새로이 세운 계명은 하느님을 온전하게 사랑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누구보다 그자신이 먼저 행하며 모범을 이끄셨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설복할수 있었다.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그분은 알고 있다. 세상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불가능한 일마저도 가능하게 만드신다고 미리 알려주신다.

 

예수님이 택한 열두명의 제자들은 특출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상한 가르침을 지식으로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삼기 위해서는 스승의 가르침의 방식이 무언가 달라야 한다. 이점에서 나는 불교의 진리를 전한 석가모니 부처와 예수님을 대조하며 생각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중생을 계도하며 행한 설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입을 다물었다. 그때 말대신 그가 취한 행동은 연꽃 한송이를 집어들고 회중 가운데로 향한 걸음이었다.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 오직 한사람의 제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고 석가모니는 진리가 가섭의 마음에 들게 되었음을 알았다.

 

드높은 진리는 은근한 꽃향기 가운데서만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십자가의 수난에서도 받아들여질수 있다는 예는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몫이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세상의 권력자에게 예수님이 침묵으로 일관하기 시작할 무렵에 이 가르침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더 이상 병자의 치유와 사람들을 배불리고 만족을 주는 기적을 통해 드러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채찍과 가시관의 날카로운 상처가 열리고, 피로 얼룩진 십자가의 언덕을 고통스럽게 오르는 발걸음만이 끝내 진리를 스스로 지고 동행한 외로운 벗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스승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런데도 후에 스승의 가르침인 복음을 세상끝까지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도들로 변화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예수님은 수난의 잔을 비우셨다. 하느님은 그런 아들 예수님을 손수 들어올리시기 위해 부활의 사건을 안식일 동안에 비밀히 마련하셨다.

 

어떤 형태의 노동도 허용하지 않는 안식일 규정 때문에 여인들은 초조하게 그날이 지나기만을 기다려 새벽같이 예수님의 시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무덤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떠오르는 해보다도 이르게 찾아온 하느님의 손길이 스쳐지나간 흔적만을 보게 될 뿐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누웠던 현장에는 단정히 접힌 머리수건만이 남아있었다. 창조는 인간이 근접할수 없는 하느님의 신성한 작품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제스추어인 동시에 배려였다. 제자들은 여인들로부터 전갈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깨우침에 눈을 뜬다. 그리고 스승 예수님의 지상의 삶이 오직 아버지이신 하느님 그리고 벗들에 대한 사랑에 남김없이 바쳐졌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그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되고 남는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과 달리 목숨까지 내놓으며 진리의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현재의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주셨습니다.'(갈라1, 4)‚

 

무덤에서 일어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아담에 비견될 생명의 창조가 완수된 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믿음과 사랑이 낳은 열매였다. 그것은 죽음을 불러온 율법(로마7, 5)의 속박을 깨며 하느님의 영으로 완전해졌다.

 

사실 부활의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활신앙은 믿음으로 열린 가슴을 필요로 한다.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의 명작성화들 가운데 십자가 수난에 관한 장면은 많지만 부활장면 자체를 소재로 다룬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완전한 솜씨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반영하는지 모른다.

 

그중 손꼽히는 작품은 독일 화가 그뤼네발트(Grunewald, Matthias)가 그린 이센하임의 수도원 성당 제대장식화를 들수 있다. 16세기 초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신 빛 가운데 죽음에서 승리한 예수님이 부활하여 무덤위에 우뚝 서있다. 땅을 딛지 않고 붉은 옷자락위에 떠오르는 듯한 예수님의 신비롭고 영광 가득한 모습앞에서 무덤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놀라 칼을 빼든채 쓰러지고 넘어지는 광경이 연출된다.

 

Matthias Grünewald: Panel from the Isenheim Altarpiece
Source: WebMuseum

 

 

승리자 예수님을 묘사한 이런 종류의 부활그림과는 전혀 다른 작품 하나가 나의 기억속에 또 대비를 이룬다. 독일 함부르그의 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으로, 작가의 이름이 유명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이 그림에 등장한 예수님은 옷을 벗은채 약간 마른 듯 하지만 건장한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덤에서 일어난 그가, 두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한쪽 다리를 들어 땅위를 딛고 올라서려 애쓰는 자세를 포착하고 있다. 마치 밤손님처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채 알몸으로 몰래 무덤을 빠져나오는 뒷모습은 퍽 의외로운 상상력의 소산으로 여겨졌다. 이 그림안에서는 도취될만한 영광스러움의 기미가 전혀 없다. 단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고독한 부활을 엿보게 될 뿐이다.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속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부활할 때도 예외없는 인간으로 다시 일어나야한다는, 소박하게 느껴지는 믿음의 주장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거룩한 날인 안식일마저도 사람이 그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을 위해 있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려는 듯 싶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그가 선언하신대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것이 틀림없다. 유대교에서 한주간의 마지막날을 안식일로 지켜왔지만, 그리스도교는 주간의 첫날을 거룩한 주일로 삼고 부활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위원)

 

 7/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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